제32대 서울특별시장
1992년 3월 제 14대 총선이 있었다. 민자당 대표 김영삼은 프라자호텔에서 이명박을 만나 서울 강남을에 민자당 후보로 출마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이명박은 김영삼의 제안을 거절했다. 출마를 할 경우 정주영의 국민당 후보와 싸워야했기 때문이다.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차에 김영삼으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상도동 자택에서 조찬을 하면서 김영삼은 새로운 제안을 했다. 지역구로 나가면 국민당 때문에 곤란하다고 하니 민자당 전국구 의원으로 나와 달라는 것이었다. 1992년 5월, 이명박은 민자당 전국구 의원으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당시 정치권은 그해 12월에 있을 제 14대 대선 열풍이 한창이었다. 민자당 지도부는 이명박에게 TV에 나와 국민당 대선 후보 정주영에 대한 네거티브 연설을 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를 거부하면서 3년 뒤인 1995년 제1회 지방선거 민자당 서울시장 경선에서 불이익을 당하고 패배했다.
이명박은 의정활동을 하는 동안 네거티브 정치를 반대하고, 보스주의 붕당정치에 저항했으며, 지역주의를 타파하고자 노력했다.
실용과 효율을 중시하는 기업 CEO 출신의 이명박으로서는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3김시대의 기성정치인들에게 그런 모습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이와 관련해 이명박은 기업 CEO 출신인 자신이 정치권에서 ‘이방인’같은 존재였다고 회상했다.
기성정치권의 견제는 이명박 제15대 총선에서 종로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극대화됐다. 종로는 정치1번지라고 불릴 정도로 한국정치의 중심인 지역구였다. 그 곳에서 이명박은 노무현 후보와 4선 중진의 정치거물인 이종찬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
정치신인으로 지나치게 빨리 중앙정치에 진출하면서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결국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되고 제2회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도전에도 실패하면서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이명박은 1998년 11월 조지워싱턴대학 객원연구원으로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떠나게 됐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그 동안 일에만 빠져 살던 이명박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서 그 동안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게 됐다. 마트에 가도 예전엔 입지조건이나 상품경쟁력부터 살폈지만 이제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됐다.
‘일’에서 ‘사람’으로 관점이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환경과 문화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무렵 이명박은 보스턴시의 ‘빅 딕 프로젝트(Big Dig Project)’를 접하게 됐다. 빅딕은 보스턴 고가도로를 철거하고 녹지를 건설하는 사업이었다.
프로젝트가 완성되면 자동차는 지하 전용도로로 다니고 지상에는 지평선 너머까지 거대한 푸른 공원이 펼쳐진다고 했다. 효율성과 비용, 공사기간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보스턴 시민들은 이 낭만적이 계획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부근의 타호 호수를 방문했을 때에는 주변상가의 하수를 호수로 흘려보내지 않고 따로 하수처리 시설을 만들어 처리하는 모습을 봤다. 당시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적극적인 개발을 통해 환경을 더욱 깨끗하고 풍요롭게 만드는 미국을 보면서 이명박은 우리의 모습을 떠올렸다. 환경을 있는 그대로 보존할 것인가, 아니면 개발을 위해 환경의 훼손을 감수할 것인가를 놓고 좌우가 갈려져 싸우는 모습들...
왜 서울시장이 되려 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이전까지는 서울을 개발해 물질적 풍요를 누리도록 하겠다는 생각이 컸다. 그러나 미국에서 얻은 영감을 통해 문화와 환경, 복지가 중심이 되는 사람 중심의 서울을 생각하게 됐다.
1999년 11월, 미국에서 돌아온 이명박은 청계천을 찾았다. 한 때 산업화의 상진이었던 청계천은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낡은 모습이었다. 더 큰 문제는 청계천 복개 구조물과 고가도로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청계고가도로를 허물고 청계천을 복원하는 것이었다. 이명박은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그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여러 전문가들을 만났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교통전문가들은 교통대란을 우려했고, 도시학자들은 청계천 주변 22만 상인들의 반발을 걱정했다. 토목 관계자들도 건설은 가능하나 수많은 이해관계를 조정할 소프트웨어가 없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서울시민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러자 전문가들의 의견과는 달리 서울시민들은 청계천 복원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높았다.
이명박은 용기를 얻었다. 현대시절 수많은 불가능을 가능케 한 일이 떠올랐다. 한번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단 1퍼센트의 가능성만 있다면 나머지 99퍼센트는 노력으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2002년 6월, 제3회 지방선거가 실시됐다. 이명박은 청계천 복원 공약을 비롯해 대도시 서울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의지와 추진력을 가진 시장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결국 181만여 표를 얻어 52.3퍼센트의 득표율로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취임식이 끝나자 서울시 국장급 공직자 몇 사람이 이명박을 찾아와 봉투를 내밀었다. 지방선거 당시 서울시 공직자 상당수가 청계천 복원을 반대하며 여당후보에게 도움을 줬다. 봉투는 그들의 명단이 들어있는 일종의 살생부였다.
몇 차례 찾아와 설득을 했지만 이명박은 살생부를 보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청계천 복원은 서울시 공직자 전원이 달라붙어 해도 될까 말까 하는 일이었다. 안 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대다수인 상황에서 일부만 데리고 일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 일은 결국 서울시 공직자들 사이에 소문이 났다. 노심초사하고 있던 공직자들은 시장이 봉투를 열어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크게 안도했다. 그리고 그 일은 서울시 공직자들을 하나로 만드는 계기가 됐다.
이명박은 청계천 복원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추진본부와 복원 연구단, 시민위원회 등 3개 조직을 구성하고 청계천 복원 작업에 들어갔다.
청계천 복원이 가시화될수록 이해 당사자들의 비판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언론도 합세해 우려의 목소리를 쏟아냈고, 당시 대중화되기 시작한 인터넷에도 비방과 이명박 시장에 대한 인신공격이 넘쳐났다.
서울시 공직자들은 비난 여론이 큰 청계천 복원을 추진하다 자칫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불이익을 당할까 우려하는 눈치였다. 이명박은 청계천 복원 사업과 관련해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본인이 책임지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명문화했다.
또한 시민들에게 복원의 타당성을 알리고 여론을 모아가기 위해 2002년 8월 13일, 청계천 복개도로 밑을 시민들과 함께 체험하는 청계천 투어 행사를 열었다.
복개도로 밑은 악취와 습기가 가득 찬 암흑 천지였다. 광교를 비롯한 문화재들은 검은 오물에 뒤덮여 방치되어 있었고, 복개도로와 고가도로를 바치고 있는 구조물들은 육안으로 보아도 상당히 부식되어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저기 불 좀 비춰보세요. 저거 새싹 아니에요?”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개똥참외 씨앗이 낡은 상판의 갈라진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가느다란 빛에 의지해 싹을 틔운 것이다. 그 모습에 크게 감동받은 이명박은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청계천을 복원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청계천 복원의 가장 큰 난관은 상인들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이명박은 서울시 공무원 중 일꾼들만을 골라 ‘상인팀’을 만들었다. 상인팀은 문전박대를 받으면서도 무려 4,200번이나 상인들을 찾아가 안면을 익히고 친분을 쌓았다.
백인백색의 상인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그들의 일을 자기 일처럼 처리해줬다. 심지어는 영업장의 쓰레기를 치우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상인팀의 이 같은 노력 끝은 2003년 6월 말, 청계천 상인들의 협조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난관은 청계천 주변의 노점상 문제였다. 청계천 주변은 노점상들의 시위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대책을 고심하던 중 이명박은 동대문운동장에 눈을 돌렸다. 상암 서울월드컵경기장이 생기면서 동대문운동장 축구장은 그 용도가 다해 몇 년 안에 공원화 할 계획이었다.
그 때까지 동대문운동장을 노점상들이 이용하도록 하기로 결정했다. 동대문운동장은 ‘동대문풍물시장’으로 이름 지었다. 주차장 등 편의시설도 지어 접근성도 용이하게 했다. 이 같은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문을 연지 1주일 만에 동대문풍물시장은 서울의 명물이 됐다.
노점상들의 매출도 크게 늘어나면서 끝까지 저항하던 노점상들도 동대문풍물시장에 들어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2005년 10월 1일, 마침내 청계천이 복원됐다. 도심 내의 대규모 하천 복원사업은 세계적으로도 그 사례가 드문 일이었다. 복원된 녹지와 하천을 따라 바람 길이 만들어지면서 청계천 주변지역의 평균기온은 3.5℃나 내려갔다.
우려하던 교통대란도 없었고, 물고기와 새들도 돌아와 동식물도 500종 가까이 늘어났다. 복개도로 밑에서 오물을 뒤집어쓰고 방치되던 역사적 유적과 유물도 복원되면서 600년 고도의 역사성도 회복했다.
도심 한복판에 휴식공간이 마련되자 하루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청계천을 찾았다. 그로인해 청계천 주변의 상권도 활성화 되면서 서울시 경제에도 크게 기여했다.
국제사회의 관심도 컸다. 2004년 베니스 국제 건축 비엔날레 최우시 시행자상에 이어 2006년에는 일본토목학회 환경상을 받았고, 2007년에는 아시아 토목공학대회에서 수상했다. 2009년에는 UN 해비타트 특별대상도시로 선정되기도 했다.
미국 하버드 대학교 건축 및 도시설계학과에 ‘청계천 스튜디오’ 강좌가 개설되어 석·박사 과정에 있는 학생들이 청계천 답사를 위해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세계 많은 도시들은 2년여 만에 완성된 청계천 복원사업을 주시했다. 단순히 하천을 복원하는 개념을 떠나,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의 심각한 갈등을 딛고 단기간에 풀어나간 서울시의 의사결정과정과 추진력에 큰 관심을 가졌다.
무엇보다도 청계천 복원은 서울이 개발주의 시대를 마감하고 사람 중심의 친환경적 도시로 다시 태어나는 전환점이 되었다는 데 의미가 컸다.